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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TV

KT 납치사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47년 전 일본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한국인 납치사건",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는 KT 납치사건"

KT 납치 사건의 KT는 KIM TAE CHUNG의 앞 이니셜을 따 KT라는 암호명을 사용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되었던 사건이며, 이일로 한일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된 사건입니다.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이야기에서는 항상 흥미로운 사건들을 가지고 와서 게스트들이 더 흥미롭게 전달해줘서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이번편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다뤄 그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 합니다!

 

시점은 1972년 박정희 정권이 통치 하고 있는 때에, 그 당시 한국 야당지도자 였던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와 일본 정계 인사들과 만나기 위해 일본 도쿄에 체류하고 있었어요. 또한 10월 유신(92년 10월 17일 대한국민구에서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의 헌법 개정 사태) 이 일어나자 김대중은 힌국민주회복토일촉진국민회의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초대 의장으로 취힘해 미국과 일본의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벌이고 있었어요. (박정희 눈에 가시였을듯..)

 

1973년 8월 8일에 김대중는 자유민주당 중의원인 기무라 도시오와의 약속장소로 가던 중 괴한 5명에게 납치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괴한들은 김대중의 옷을 잡억복을 갈아입히고, 차에 태워 1시간 가량 달려 바닷가에 도착 후, 정학해 있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요금호에 김대중을 인계합니다. 

 

용금호에 있는 사람들은 김대중을 바다에 던져 살인을 할 예정이였어요. (손발들 묶고, 바위를 발목에 달아 던져버릴려고 함.) 그러던 중 어디던가 비행기를 나타났고, 배와 비행기가 서로 쫓기고 쫓는 상황이 30분가량 지속되었고, 다행히 김대중은 바다로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 후 선원들은 8월 11일 새벽 부상항에서 수면제에 의해 잠들었고, 그 후 차에 태워져 서울에 자택근처에서 풀렸났습니다. 납치되고 129시간 만에 살아 돌아오게 되었어요. 

 

미국의 CIA가 도와서 인지, 일본 자위대 비행기 였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미국 CIA의 연락를 받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이 였다고 주장(추측)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건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국내외의 비난여론을 엄청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권력 개입설을 거부하고 모르쇠를 일관했고, 일본 경기청이 사건현장에서 범인의 지문은 채취하는등의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관련자들은 출두를 요청하지만 이를 거부했어요. 때문에 일본내에서는 국권침해에 대한 강한 비난여론이 등 한일 관계가 나빠졌어요.

 

또한 박정희에 의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나 사건을 수사를 하긴 한건지 아무런 성과없이 내사종결을 해버립니다. 

 

이 사건 이후로 서울대 문리대가 유신반대운동을 시작했고, 경북대, 부산대등까지 이 운동이 번지게 되었어요. 또한 김수환 추기경, 장준하 선생, 함석헌 선생 등의 주도로 개헌청원 100만 서명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유신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어두운 역사를 보여주지만 거기에 맞서 싸웠던 분들은 생각하면 덕분에 민주주의로 한단계 나아가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네요. 또 한번 용기내서 앞에 나서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면서 살아야 겠어요!